인간의 두뇌에는 두가지 능력이 있다.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억하고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또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합리화 하여 살아남을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살아 남기 위해서 객관적인 세계로부터의 정보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판단하고 기억하는 능력을 발달시켜 왔다. 이것이 인간이 과학을 만들어내고 세계를 향한 지적 탐구를 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이 능력은 순수한 지적 탐구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고, 실험을 통해 검증해 내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객관적인 지식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과정들을 지켜보면 인간은 매우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기억하고 쌓아온 지식들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합리성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채집을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인류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기억해야 할 일들은 무수하게 많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조금이라도 불합리하다면 생존은 매우 크게 위태로워진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이런 일화를 전하고 있다. 파푸아 뉴기니 원주민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가려고 기다리던 때에 에피소드로 기억한다. 국경을 넘어가는데 시간이 지체될 것이 예상되자 원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해 오겠다고 하면서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원주민들은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버섯을 채취해 온 후 이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는 그 모습을 보고 혹시라도 버섯에 독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주민은 화를 내면서 "버섯에 독이 있는지 모르는지를 모르는 바보 같은 인간들은 미국인 밖에 없다."라고 말하고는 먹을 수 있는 버섯의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는데 총 27가지 식용 버섯의 종류와 모양, 그리고 어디에서 주로 채집할 수 있는지 등을 설명해 주었다.

또 같은 책에서 다른 에피소드가 나온다. 농경이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채집을 주로 하면서 이제 막 정착이 시작될 무렵으로 추정되는 집단의 주거지가 발굴되어 조사를 한 내용이 있었다. 이 주거지에서는 야생 곡물들의 종자를 가져와 심어 본 흔적들, 즉 농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본 흔적들이 있었는데, 그 주거지에서 발견된 곡물의 종류만 100가지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기억을 더듬어 적느라 정확한 숫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인간은 이렇게 생존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연을 시험하는 법을 일찍이 터득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실험해 본 대상들의 특성들을 열심히 조사했을 것이다. 씨앗의 크기는 충분한지, 심어진 양 대비 산출량은 적절한지, 식용으로 사용하기까지 필요한 작업들은 어느 정도인지, 추수에는 어려움이 없는지, 그리고 적절히 저장하여 두었다가 다시 심어도 발아에 문제가 없는지 등을 조사했다. 이런 방법은 도구나 대상이 다른 점을 제외하곤 현대의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나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당연히 합리적인 이성이 모든 정신을 지배하는 존재여야 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와는 정 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생존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아이러니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매우 이성적인 사고를 발달 시킨 것과 같이, 그리고 그 사고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과 같이 어떤 본능 하나를 생존을 위해 키워 나갔다. 그것이 바로 "나는 꼭 존재해야 만 한다"는 비 이성적인 전제, 즉 생존 본능이다.

생존 본능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는 이성적으로 추적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것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매우 강하게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류를 찾아보기에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인간처럼 일반적으로는 생존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여러 조건들(유아기가 너무 길다든지, 체력이 다른 동물들보다 약하고, 강력한 무기가 될만한 신체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든지 하는 것 들)을 생각해 보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이 생존 본능이 더욱 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이아몬드의 책에 다시 넘어가보면 떠돌이 채집 생활을 하는 종족들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즉 이미 낳은 아이가 아직 어려서 혼자 걷지 못하는 시기에 다음번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 어쩔 수 없이 살해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유독 자기 생존을 위해서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평생 스스로에게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나 먹을 거리를 쌓아두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생존 본능에 있어서는 인간이 단연 모든 동물 중에서 으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이 왜 비합리적이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합리적으로 사고 하는 부분과 "나는 꼭 존재해야 만 한다"는 본능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두뇌의 대부분은 매우 이성적이다. 세계는 내가 원한다고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거짓으로 바뀌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실은 온전히 사실로만 받아 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긍정적인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경우, 즉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오직 사실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 인간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응용 물리학자라고 하자.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물리적 지식이 실제 어떤 장치로 만들어 질 수 있어야 한다. 이 장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는 당연히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만일 내가 알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 즉 물리학적인 지식이 잘못되었다면 나는 어떠한 노력을 들여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개인적인 사고 편향을 가지고 있어서 상대성 이론은 받아 들여도 양자 역학은 죽어도 못받아 들이겠다면(아인슈타인처럼) 내가 양자 역학에 기초한 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즉 정말로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응용 물리학자로서의 내 삶은 매우 고달퍼질 것이다. 이 예에서의 인간의 합리성과 생존 본능은 그대로 이성적인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합리성과 생존 본능의 결합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합리성은 보통 충분히 성숙된 나이에 자리를 잡는다. 인간이 세상을 충분히 알고 이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기가 될 때까지 두뇌는 이성적인 사고에 지배 받기 보다는 생존 본능에 더 크게 지배를 받는다. 이 시기에 만약 생존 본능을 크게 자극 받는 일들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다든지, 살고 있는 사회가 비 이성적인 행위나 삶을 강요한다든지, 불건전한 사상이나 종교에 물든 어른들 틈에서 자란다든지 하는 상황이 되면 이성적인 사고의 영역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생존을 위한 본능이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근본적으로 합리의 영역이기 때문에 역시 합리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보통 생존을 위한 합리성 영역, 즉 실제로는 합리적이지 않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이것이 꼭 필요하고, 자신이 생존할 가치가 있음을 지속적으로 찾아 내려는 합리적인 노력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이 자기 합리화이다.

이 자기 합리화 과정을 좀 더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생존을 위협하는 주변 인자들이 있다. 안타까운 가정이지만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이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그 머리 속에는 지속적으로 "내가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생존 본능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결국 생존 본능은 합리성 영역과 만나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 합리성 영역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을 하는 영역이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은 자꾸 생존 본능을 자극 받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해석을 본능적 해석으로 바꾸게 된다. 이 해석은 일반적인 사람의 해석과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비 상식적인 형태로 바뀐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학대 받아 당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나, "모든 사람들이 학대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양상은 다양하지만 그런 생각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기 합리화 과정이 비단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 이성적인 사상이나 종교의 영향 아래 있다. 이들은 이미 이 사상이나 종교 아래에서 자기 생존을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스스로 비 이성적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종교에 의한 전쟁은 수세기동안 계속되어온 문제이다.


그러면 이 자기 합리화 문제가 우리 사회에는 없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이 자기 합리화된 생각인지 아닌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이다. 나의 행동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합리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생존을 위협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기 시작하는 순간 위에서 이야기 했던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합리화의 기제가 동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회는 비 이성적인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인간의 합리성과 생존 본능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상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즉 자기 스스로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있어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일단 생존 본능이 자리잡은 이성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정화적인 노력이 없이는 스스로 치유될 수도 없다. 내가 생존하고 있는 사회가 끊임없이 자기 정화를 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도 사회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사람의 두뇌는 나이가 들수록 굳어간다. 하지만 이것도 절반만 사실이다. 주위 세계가 자기 정화를 강요하는 수준이 생존 본능을 자극할 수준이라면 어느 누구도 현재 자기의 상태에 안주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두뇌에 부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충분히 훈련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훈련이 두뇌를 깨어 있게 만들고, 항상 세계를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Posted by 이세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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