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두뇌에는 두가지 능력이 있다.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억하고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또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합리화 하여 살아남을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살아 남기 위해서 객관적인 세계로부터의 정보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판단하고 기억하는 능력을 발달시켜 왔다. 이것이 인간이 과학을 만들어내고 세계를 향한 지적 탐구를 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이 능력은 순수한 지적 탐구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고, 실험을 통해 검증해 내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객관적인 지식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과정들을 지켜보면 인간은 매우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기억하고 쌓아온 지식들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합리성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채집을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인류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기억해야 할 일들은 무수하게 많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조금이라도 불합리하다면 생존은 매우 크게 위태로워진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이런 일화를 전하고 있다. 파푸아 뉴기니 원주민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가려고 기다리던 때에 에피소드로 기억한다. 국경을 넘어가는데 시간이 지체될 것이 예상되자 원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해 오겠다고 하면서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원주민들은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버섯을 채취해 온 후 이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는 그 모습을 보고 혹시라도 버섯에 독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주민은 화를 내면서 "버섯에 독이 있는지 모르는지를 모르는 바보 같은 인간들은 미국인 밖에 없다."라고 말하고는 먹을 수 있는 버섯의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는데 총 27가지 식용 버섯의 종류와 모양, 그리고 어디에서 주로 채집할 수 있는지 등을 설명해 주었다.

또 같은 책에서 다른 에피소드가 나온다. 농경이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채집을 주로 하면서 이제 막 정착이 시작될 무렵으로 추정되는 집단의 주거지가 발굴되어 조사를 한 내용이 있었다. 이 주거지에서는 야생 곡물들의 종자를 가져와 심어 본 흔적들, 즉 농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본 흔적들이 있었는데, 그 주거지에서 발견된 곡물의 종류만 100가지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기억을 더듬어 적느라 정확한 숫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인간은 이렇게 생존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연을 시험하는 법을 일찍이 터득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실험해 본 대상들의 특성들을 열심히 조사했을 것이다. 씨앗의 크기는 충분한지, 심어진 양 대비 산출량은 적절한지, 식용으로 사용하기까지 필요한 작업들은 어느 정도인지, 추수에는 어려움이 없는지, 그리고 적절히 저장하여 두었다가 다시 심어도 발아에 문제가 없는지 등을 조사했다. 이런 방법은 도구나 대상이 다른 점을 제외하곤 현대의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나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당연히 합리적인 이성이 모든 정신을 지배하는 존재여야 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와는 정 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생존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아이러니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매우 이성적인 사고를 발달 시킨 것과 같이, 그리고 그 사고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과 같이 어떤 본능 하나를 생존을 위해 키워 나갔다. 그것이 바로 "나는 꼭 존재해야 만 한다"는 비 이성적인 전제, 즉 생존 본능이다.

생존 본능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는 이성적으로 추적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것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매우 강하게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류를 찾아보기에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인간처럼 일반적으로는 생존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여러 조건들(유아기가 너무 길다든지, 체력이 다른 동물들보다 약하고, 강력한 무기가 될만한 신체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든지 하는 것 들)을 생각해 보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이 생존 본능이 더욱 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이아몬드의 책에 다시 넘어가보면 떠돌이 채집 생활을 하는 종족들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즉 이미 낳은 아이가 아직 어려서 혼자 걷지 못하는 시기에 다음번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 어쩔 수 없이 살해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유독 자기 생존을 위해서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평생 스스로에게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나 먹을 거리를 쌓아두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생존 본능에 있어서는 인간이 단연 모든 동물 중에서 으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이 왜 비합리적이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합리적으로 사고 하는 부분과 "나는 꼭 존재해야 만 한다"는 본능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두뇌의 대부분은 매우 이성적이다. 세계는 내가 원한다고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거짓으로 바뀌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실은 온전히 사실로만 받아 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긍정적인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경우, 즉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오직 사실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 인간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응용 물리학자라고 하자.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물리적 지식이 실제 어떤 장치로 만들어 질 수 있어야 한다. 이 장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는 당연히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만일 내가 알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 즉 물리학적인 지식이 잘못되었다면 나는 어떠한 노력을 들여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개인적인 사고 편향을 가지고 있어서 상대성 이론은 받아 들여도 양자 역학은 죽어도 못받아 들이겠다면(아인슈타인처럼) 내가 양자 역학에 기초한 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즉 정말로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응용 물리학자로서의 내 삶은 매우 고달퍼질 것이다. 이 예에서의 인간의 합리성과 생존 본능은 그대로 이성적인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합리성과 생존 본능의 결합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합리성은 보통 충분히 성숙된 나이에 자리를 잡는다. 인간이 세상을 충분히 알고 이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기가 될 때까지 두뇌는 이성적인 사고에 지배 받기 보다는 생존 본능에 더 크게 지배를 받는다. 이 시기에 만약 생존 본능을 크게 자극 받는 일들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다든지, 살고 있는 사회가 비 이성적인 행위나 삶을 강요한다든지, 불건전한 사상이나 종교에 물든 어른들 틈에서 자란다든지 하는 상황이 되면 이성적인 사고의 영역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생존을 위한 본능이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근본적으로 합리의 영역이기 때문에 역시 합리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보통 생존을 위한 합리성 영역, 즉 실제로는 합리적이지 않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이것이 꼭 필요하고, 자신이 생존할 가치가 있음을 지속적으로 찾아 내려는 합리적인 노력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이 자기 합리화이다.

이 자기 합리화 과정을 좀 더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생존을 위협하는 주변 인자들이 있다. 안타까운 가정이지만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이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그 머리 속에는 지속적으로 "내가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생존 본능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결국 생존 본능은 합리성 영역과 만나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 합리성 영역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을 하는 영역이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은 자꾸 생존 본능을 자극 받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해석을 본능적 해석으로 바꾸게 된다. 이 해석은 일반적인 사람의 해석과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비 상식적인 형태로 바뀐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학대 받아 당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나, "모든 사람들이 학대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양상은 다양하지만 그런 생각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기 합리화 과정이 비단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 이성적인 사상이나 종교의 영향 아래 있다. 이들은 이미 이 사상이나 종교 아래에서 자기 생존을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스스로 비 이성적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종교에 의한 전쟁은 수세기동안 계속되어온 문제이다.


그러면 이 자기 합리화 문제가 우리 사회에는 없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이 자기 합리화된 생각인지 아닌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이다. 나의 행동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합리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생존을 위협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기 시작하는 순간 위에서 이야기 했던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합리화의 기제가 동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회는 비 이성적인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인간의 합리성과 생존 본능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상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즉 자기 스스로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있어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일단 생존 본능이 자리잡은 이성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정화적인 노력이 없이는 스스로 치유될 수도 없다. 내가 생존하고 있는 사회가 끊임없이 자기 정화를 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도 사회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사람의 두뇌는 나이가 들수록 굳어간다. 하지만 이것도 절반만 사실이다. 주위 세계가 자기 정화를 강요하는 수준이 생존 본능을 자극할 수준이라면 어느 누구도 현재 자기의 상태에 안주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두뇌에 부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충분히 훈련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훈련이 두뇌를 깨어 있게 만들고, 항상 세계를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Posted by 이세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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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일을 가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말 특별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삶이란 겉으로 보면 모두 다 똑같아 보인다. 누구나 다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은 드물고, 나는 남들보다 특별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사실 겉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조금씩 멀어져 보자. 조금씩 멀어지다 보면 점점 더 넓은 세상이 보인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사람들의 개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종교와 같이 사람들을 죽음의 갈등으로 몰아 넣는 것들도 시시해지고, 피부색은 보이지 않으며 이념은 자취를 감춘다. 지구에서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누군가가 거기에 무언가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찬란하게 빛나는 인류 문명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바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의심해도 단 한가지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데카르트 같은 사람은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을 회의적인 철학적 사유로 풀어 냈지만, 내 경험상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사유적 금기이다. 그 이유는 그 의심이 어떠한 가치도 만들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유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될 수도 없고, 이득이 될만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이야기 한들 들어줄 사람도 없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은 끊임 없는 자기 검증과도 같다. 어떤 기계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계속 자기 자신이 정상인가를 확인한다고 하자. 그 기계는 과연 쓸모 있는 기계인가?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준다고 해서 그 기계의 가치가 달라지는가? 기껏해야 그건 그냥 정상인 기계에 불과하다. 의심해야 할 것은 의심하되 의심하지 말하야 할 것은 관심도 두지 말아야 한다. 영국의 경험론은 "물의 깊이는 알 필요가 없다. 배를 띄울 수 있는지 없는지만 중요할 뿐이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공자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는지를 묻는 제자에게 "사람이 사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죽은 이후에 대해서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을 일축시켰다. 그래서 유교에는 사후 세계가 없다.

자,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그럼 일단 내가 존재한다고 치고, 내가 하는 일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존재 가치도 있는게 아니겠는가?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가? 아래 보기가 있다.


1. 열심히 한다.

2. 돈을 벌기 위해서 한다. 밥 벌어 먹기 위해서 한다.

3. 가족을 위해서 한다.

4. 회사를 위해서 한다.


눈치 챘겠지만 저 중에는 정답이 없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가치 있어지는 일은 없다. 누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면 충분히 의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히틀러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에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 매우 성실하게 매일 같이 근력 운동을 하면 근육은 커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매일 같이 열심히 일을 하면 실력은 늘지 않는다. 근육은 쉴 때 커지고, 능력은 놀 때 자란다. 간단한 예로 내가 지금 이 시간에 회사에서 매일 같이 일을 하고 있다면 내가 쓴 블로그 글들은 한 개도 없을 것이며, 내가 블로그를 쓰면서 소프트웨어에 대한 개념들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수치로 계산해 볼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해낸 (내 생각에) 창의적인 발상이나 이해는 컴퓨터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 대부분 커피를 타러 갈 때와 화장실에 갔을 때, 자면서 꿈에 나타난 것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낫다. 적어도 자기가 존재해야 가치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 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은 세상에 단 한가지도 없다.

가족을 위해서 일 하는 것. 일면 좋은 일일 수 있다.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일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으려면 실제로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숭고한 일일 수는 있어도 항상 가치 있는 일은 아니다. 일하는 스타일로 치면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실속은 없는 일에 매달릴 수 있다. 일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일을 계속하거나 일에 대한 평판을 좋게 만드는데에만 신경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것. 말할 필요도 없이 가치 없는 짓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동기 부여를 한다. 자기 만족,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위해,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질적인 일의 내용이 바뀌지 않는데 그 일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무가치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 기만이다. 즉, 속이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가치가 없어지는 때는 이 어설픈 속임수가 자기 스스로에게 들통났을 때이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가 몸이 상해가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일은 가치가 없어진다. 스스로 속이는 일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서 가치가 있는 일로 만들어 보려 했지만 자기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보다 가치 있지는 않다. 가족을 위해서 일하다 보니 회사와 동료들을 속여가면 자기가 하는 일을 포장하는 자기를 발견했을 때. 자기가 벌이던 사기 행각이 자기에게 발각되었을 때. 그 때처럼 자기가 하는 일이 가치 없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어 질까? 이것이 애초에 무가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즉 속임수라면 어설프게 속일 것이 아니라 제대로 속여야 한다. 한마디로 판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자신까지도 자기 일이 가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자기 일을 가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자기가 자기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 밖에 없다. 한마디로 영원히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앞서서 시야를 넓혀 가면서 점점 내가 사는 곳과 멀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이제 관점을 바꿔보자. 과거로 가보자. 까마득히 멀리 떠나서 약 7만년 전 쯤으로 가보자. 유발 하라리가 인지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그 시점쯤 되겠다. 그 인지 혁명이 7만년전에 인류를 하나로 만들고 공통된 목적을 추구하며 보이지 않는 상상의 것들을 믿게 끔 만들었다고 해서 그들이 살던 삶이 그 순간 가치 있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원시인이었으며, 먹는 것, 자는 것, 생존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였다. 두뇌는 현대인들과 비슷했을지라도 그들의 삶은 매우 비 상식적이었을 것이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지금도 파푸아 뉴기니의 서로 다른 부족 사람 둘이 만났을 때를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파푸아 뉴기니에서 다른 부족 사람들이 서로 만났을 경우 그들은 대부분 이웃 부족 사람들이다. 이웃 부족 사람들끼리는 서로 살인이 일어나기도 하고 혼인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을 나갔기 때문에 둘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인지하면 조심스럽게 상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위협이 없다고 생각하면 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는다. 그리고 서로 자기 가계도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둘이 서로 인척관계가 있는지, 서로 알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확인이 필요한 이유는 서로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다. 이러한 일이 7만년 전에는 없었을까? 지금의 우리가 낯선 이들에게 얼마나 호의적으로 대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답은 상당히 뻔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완성된 언어가 있고, 사회적으로 서로 잘 엮여 있어서 일말의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면 모르겠지만 사냥을 위해 떠돌아 다니는 두 집단이 서로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상당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들도 당연히 사냥을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무장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들이 서로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그럼 이제 현대로 돌아와 보자. 여러분이 방금 전까지 상상했던 일들과 현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뇌가 7만년 사이에 개벽하듯 변화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크게 말해서 문명 그 자체에 있다. 현재의 인류가 벌이는 행태에 분개하면서 문명을 저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최근까지 벌어졌던 수많은 전쟁과 인종학살, 혐오범죄, 차별들을 떠올리면서 인류는 7만년 전과 전혀 달라진게 없다고 믿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딱 한가지 사실만 이야기 해보겠다. 지금의 시대는 인류의 어느 시대에 비해서도 폭력이 가장 적은 시대이다. 인정하기 싫을지 모르지만 인류는 7만년 동안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추세라면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다. 물론 굴곡이 있고, 어느 순간 상상하지도 못할 엄청난 일이 발생해서 여태껏 쌓아 왔던 수많은 업적들이 대부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에는 언제나 전쟁과 살인이 있었듯이 항상 그 사이 사이에는 찬란한 문명들이 존재했다. 황금기의 로마,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시대, 그리스의 황금기인 페리클래스 시대, 그리고 미처 열거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왕조, 어느 나라, 어느 문명에서도 황금기가 있었다. 이것은 7만년전을 기준으로 보면 매우 기형적인 일이다. 과연 인류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싶은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돌아보면 지금이 그래도 낫다는 아이러니 같은 존재가 인류이다.

현대의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작은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인류가 자기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목숨을 내놓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서 자유와 평등의 사상을 기반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충성을 맹세할 필요가 없는 (이론적으로는)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류의 지성은 크나큰 발전을 한 것이다. 적어도 이 자유와 평등의 사상 만큼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이렇게 보편적으로 적용된 경우가 없었다. 만약 7만년 전보다 지금이 어떤 면에서건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이제 자기를 속여 볼 시간이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보자. 내가 하는 일은 인류 전체에게 아무리 작으나마 기여를 하는 일이라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면 (나도 실제로는 하고 있지 못하지만) 오픈 소스에 기웃 거려 보자. 오픈소스를 다운 받고, 분석해보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기능을 추가해본다면 이미 인류에 기여한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럴만한 능력이 안되서 시도를 못하고 있는 일이지만 지금은 블로그라도 써서 올리면서 지식을 공유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미 발전을 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류에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 인류가 하는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것이 내가 나를 충분히 속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내가 하는 일하고 오픈 소스에 기여하는 것은 다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하는 일로 실력이 늘고, 늘어난 실력이 오픈 소스에 기여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내가 하는 일이 인류에 기여하는 가치 있는 일이 되지 않는가?


자 이제 자신을 속이는 방법을 좀 더 단순한 단계로 정리해 보겠다.

1. 인류는 발전해 왔다.

2. 내가 (특정한 사람이 아닌) 보편적인 사람에게 작은 일이라도 기여하면 내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3. 그러면 인류는 더 발전할 것이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을 가치 있게 만드는 방법은 1번에서 시작한다.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시작이다. 단순히 믿는 것과 어떤 식으로든 확인해가면서 확신을 쌓아가면서 믿게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따라서 끊임 없이 과거를 공부해야 한다. 과거 인류에게 있었던 어떤 일들이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인류가 발전해 왔다는 것을 믿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 스스로에게 인류라는 가치 있는 존재에게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스스로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겠다. 이것은 믿음일 뿐이다. 믿음은 잘 알았을 때보다 잘 속았을 때 더 잘 생겨난다. 하지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리"라는 것은 "보편되게 믿어지는 사실"이라는 것을. 그 대단한 진리라는 것 조차 정의를 살펴보면 일개 믿음일 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믿음이 속는 것이라면 적어도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에 속아 주어야 한다. 대충 "인류" 정도 되면 나 조차도 깜빡 속일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이세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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